숨결 (5부)
재훈은 쇼핑 카트를 밀며 무심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한시를 조금 넘긴 시간 탓인지 생각만큼 할인점안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무료한 오후의 시간을 달래려 함인지 할인점안은 온통 여자들이나 부부인듯한 다정한 남녀들만이 북적 거리고 있었고 남자 혼자 쇼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재훈 이외는 없는듯 했다. 그래서일까 혼자 쇼핑을 하는 재훈을 간혹 지나가던 여성들이 흘끔 거리며 쳐다보기도 했다. 재훈은 난감했다. 도대체 어떤 살림 도구를 준비해야 하는지도 막연했고 또 어떤것들이 좋은 물건인지 구분을 할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재훈은 당장 필요한 몇몇 살림 도구와 쌀, 라면등 간단한 부식 몇가지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커다란 봉투를 들고 주차장을 향하던 재훈은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럴때 헤어진 선영이 곁에 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훈은 고개를 흔들며 선영의 생각을 떨치려고 했다. [ 나를 버리고 떠난 여자다.. 잊자.. ] 생각을 정리한 재훈이 조수석에 봉투를 밀어 넣고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 ~부르릉~~~ 부릉~~ " 시동을 걸고 살며시 엑셀레이터를 몇번 밟자 재훈의 찹찹한 가슴을 뚫어줄듯 자동차 엔진 소리가 명쾌하게 재훈의 귀에 밀려 들어왔다. 차가 할인점을 빠져 나오자 한적한 지방 국도의 풍경이 재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여름을 지나 가을을 향해 달리는 계절탓인지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재훈은 손을 움직여 운전석의 창문을 내렸다. 마지막 늦여름의 텁텁하면서 상쾌한 바람이 차안으로 밀려들며 재훈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기분이였다. 재훈은 손을 움직여 오디오의 전원을 키고 자신이 늘 즐겨듣던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플린의 시디를 집어 넣었다. 요란한 헤비메탈의 음악이 차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재훈은 엑셀레이터에 놓여진 자신의 발에 힘을 주었다. " 우우웅~~~~ " 알피엠이 올라가는 요란한 엔진 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재훈의 차가 기다렸다는듯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 몇개월간 재훈의 가슴을 어지럽게 했던 기억들을 날려버리려는듯 재훈은 자신의 발에 힘을 더욱 가하며 속도를 높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한.. 선영... 그래.. 잊는다.. 한.선.영... 잊는다고.... 알았냐... " 재훈의 커다란 외침과 헤비메탈의 요란한 음악 소리 그리고 요란한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어우러지며 한낮의 한적한 도로위를 현란하게 색칠하듯 그렇게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 빌릴릴~~~.. 빌릴리~~~.... "
전화벨리 울리자 성훈은( 재훈이 이사오던날 전화를 했던 재훈의 친구 입니다 )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네.. 영업부의 강 성훈 대리 입니다.. " " ...... " 전화기 저편의 인물은 말이 없었다. 성훈이 다시 한번 수화기에 말을 되풀이 했다 " 영업부.. 강 성훈 대리 입니다.. " " 성훈씨.. 저예요.. 선영이.. " " 예.. " 뜻밖의 대답에 성훈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뻔 했다. " 선영씨.. " "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시죠.. 재희씨도 잘지내죠.. " " 네.. 그런데 어떻게.. " 성훈은 상대방의 인사에 건성으로 대답한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 저.. 혹시 오늘 시간 있으시면..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 " 하실 말씀이라도.. " 순간 성훈은 조금은 냉정한 투로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친구를 버리고 떠난 여자였다. 그리고 그로인해 자신의 친구는 적지않은 시간을 술로 방황하며 자신을 안타깝게 만들었었다. " 죄송해요.. 오늘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
" 알겠읍니다.. 한 일곱시쯤 괜찮으시겠읍니까.. " " 네.. 알겠읍니다.. 그럼 어디서.. " " 목가.. 아시죠.. 거기서 뵙죠.. " " 네.. 알겠읍니다.. 그럼 이따뵙죠.. " 선영과의 전화를 끝내고 성훈은 자리에 앉아 생각에 빠져 들었다. [ 갑자기 이 여자가 왜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재훈이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 성훈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알수가 없었다. 자신의 친구였던 재훈을 정말이지 냉정할 정도로 버리고 떠난 여자였다. 그런 그 여자가 육개월이 지난 지금에와서 전화를 한것인지 성훈은 도무지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 어이.. 강대리.. "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성훈을 향해 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네.. " " 상반기 영업 결산서 가져와보게.. " " 네.. 알겠읍니다.. " 성훈은 대답과 동시에 자신의 책상에 놓여진 문서꽃이를 뒤척 거렸다.
성훈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통 나무만으로 내부 인테이러를 장식한 실내 풍경과 더불어 조용한 음악이 성훈의 귀에 들어왔다. 성훈은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며 실내를 훑어보다 구석진쪽에 앉아 멍하니 탁자위에 놓여진 커피잔을 바라보던 선영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 안녕하셨읍니까.. " 성훈이 인사를 건네자 깜짝 놀란듯이 선영이 고개를 들었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성훈에게 목례를 건냈다. " 오셨어요.. " 선영이 인사를 건내자 성훈은 다시 한번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성훈은 자리에 앉자 선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영의 얼굴은 그 사이에 수척해진듯 보였다. 얼굴빛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 뭐.. 드릴까요.. "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흐를즘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으려 했다. " 전 이미.. 성훈씨나.. " " 네.. 아이리쉬 커피 한잔 주십시요.. " " 네.. "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물러나 주문한 커피가 나올때까지 두 사람은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창밖만을 바라다 보았다. 성훈은 탁자위에 놓여진 커피를 들고 한모금을 마신뒤 잔을 내려놓며 두 사람간에 오가는 침묵이 부담스러운듯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