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떡 - 13부
"유라야, 앉아 앉아."
어느새 의자에 걸터앉은 동철오빠는 자리에 앉으라며 자신에게 권하고 있었다.
"아, 으응.."
어질어질한 마음을 잠시 억누르곤 유라는 의자에 앉았다.
"왜, 왜 그런거야 오빠..?"
동철에게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유라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가시를 겨우 삼켜낸다. 어떻게 온 면회인데, 내가 어떤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온 건데, 여기서 망칠 순 없었다.
"오빠 이거, 내가 도시락 싸왔어."
그리곤 준비해온 도시락을 힘겹게 테이블로 올려놓았다.
"에이, 뭘 이런걸 잔뜩 싸오고 그래~"
미안함과 쑥쓰러움이 잔뜩 배긴 목소리가 동철에게서 흘러나온다. 그런 그의 머쓱함에 유라는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동철오빠, 역시 우리 동철오빠는 착해!"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행동은 분명 자신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냥 군대에서 오래 있다보니까, 군대는 계급사회니까 오빠도 약간 변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오빠가 틀림 없...
"에이, 이런거 말고.. 유라야, 뭐 피자나 치킨 이런건 없어?"
하지만 그런 유라의 얄팍한 기대를 뭉개버리듯, 동철은 그녀의 도시락을 테이블 한켠으로 밀어넣는다.
"여기 배달키시면 치킨 정도는 갖다주니까. 흐흐, 오랜만에 사제 기름 맛좀 봐야겠는데~ 유라야 휴대폰 좀 줘봐!"
"어? 으,응 오빠. 여기..."
유라의 스마트폰을 잽싸게 뺏어든 동철은 면회실 테이블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치킨집 번호를 눌러 치킨 두마리를 시켰다.
"이 집이 졸라 맛 없고 비싸긴 한데, 그래도 사제 음식이니까 뭐..~ 아, 유라야 치킨값 정도는 있지?"
"으응, 5만원 가지고 왔어 오빠."
"휴 잘됐다! 어휴, 오늘도 맛 대가리 없는 짬이나 처먹어야하는 줄 알았는데, 유라 네가 면회 와서 정말 살았지 뭐야. 고맙다, 정말 고마워!"
치킨이 먹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라는 그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두마리는..
그걸 먹고나면 내 도시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미 치킨으로 배가 부른 그가 도시락도 먹을 수 있긴 한걸까.
동철은 멸치볶음은 유난히도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좋아하는 멸치볶음으로 주먹밥이랑 유부초밥을 만들어서 잔뜩 싸온건데,
관심도 없는 그의 행동에, 유라는 마음이 착잡해져만 갔다.
"오늘 그.. 흠흠, 오늘 차림에 신경 좀 썼는데?"
면회실 자리도 구하고 치킨도 시키고나니 여유가 생긴 동철은 유라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빨간 원피스와 옅은 화장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은, 동철의 시선을 부여잡기엔 충분했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한 걸까, 동철은 사뭇 도발적인 유라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으응. 근데, 나한테 이런 옷은 좀...안 어울리지?"
그의 시선에 부끄러워진 유라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움츠린다.
사실 동철은 옛날부터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했었다.
긴 하얀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호기롭게 공언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유라는 중학생일때부터 동철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조금씩 키워왔었던 것이었다.
"이번 면회때는 꼭 그가 좋아하는 옷으로 오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신은 기찬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가 입으라고 던져준 옷, 마치 너는 그런 야한 옷의 수준 정도 밖에 안된다는 듯이 굴던 기찬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동철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죽을만큼 창피한 유라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딴 옷,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아냐, 아냐! 완전 잘 어울리는데? 진짜 끝내준다!"
하지만 유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동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평소 여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인 군인에게는 이성의 체취 하나하나도 자극적인 것이 되곤 했었다.
오죽하면 "군대 내무반에는 찢겨진 MAXIM 잡지가 그렇게나 많다"는 소문이 파다했겠는가.
하지만 웃프게도 그것은 사실이었고, 매일 밤마다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군 장병들이 섹시한 모델이 나온 잡지를 통해 스스로 욕구를 해소하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걸 어디서 구해서 입은거야?"
"아, 그 친구가 남자들은 이런거 좋아한다고 해서..."
"이야, 완전 새끈한게..,흐흐! 그 친구 분한테 센스 넘친다고 꼭 전해주라."
동철은 이런 옷을 입고온 유라가 정말 고마웠다.
"진짜 개 쩐다, 저런 애가 내 여자친구라니.."
사실 동철도 몇번인가 MAXIM 잡지를 말아쥐곤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라는 역시 그 잡지 모델들 못지 않게,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훨씬 더 섹시하게 느껴질만큼, 지금의 그녀에겐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동철은 의자를 옮겨 유라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좁은 테이블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곤 유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면회실을 둘러봤다.
그럴때마다 동철은 다양한 장병들과 눈이 마주쳤다.
더러는 후임이었고 몇몇은 자신의 선임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는 타 대대의 아저씨들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유라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눈 안에는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가 마구 섞여있었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런 여자가 내 여자라고!
비록 입밖으로 내뱉는 말은 없었지만, 그 순간 동철은 분명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반면 유라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낯선 장소가 점차 부담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물며 익숙했던 이의 낯선 모습마저도...유라는 한 발자국씩 점점 밀쳐지고 있었다.
동철은 마치 자랑하듯 자신을 다룬다.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가 하고 있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너무나 싫은, 정말 죽을만큼 싫지었만 끔찍할 만큼 익숙해져버린.
동철은 지금, 너무나도 기찬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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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를 나선 유라는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발을 옮겨 어렵지 않게 기찬을 만날 수 있었다.
"면회는 잘 하고 왔어?"
담배꽁초가 차량 재떨이를 수북히 채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을텐데, 의외로 기찬은 면회를 잘 하고 왔는지를 먼저 물어왔다.
"네, 덕분에요. 오래 기다리셨을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유라는 진심으로 기찬에게 고맙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긴했지만, 그는 약속대로 자신이 면회를 할 수 있도록 데려다주고 또 데려가기 위해 긴 시간을 홀로 기다려 줬으니 말이다.
"기다리는게 뭐라고... 아, 됐으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기찬은 머쓱했는지 괜시리 툴툴대고 말았지만, 이상하게도 유라에게는 오히려 그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맛있는거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죽겠어."
"앗,"
유라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었고, 지금이 오후 5시가 약간 지나고 있었으니 기찬이 저렇게 구는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죄, 죄송해요. 금방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유라는 그렇게 말하곤 차의 뒷좌석에 들고 있던 짐을 구겨넣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짐을 싣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굳어버린다.
도시락이다.
유라는 최대한 티 안나게 도시락을 집어들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손잡이 위로 묵직한 감촉이 손 안에 그대로 느껴진다.
결국 기찬은 자신의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아니, 한번 열어보지도 않았다.
치킨 두 마리에 정신이 팔린 그에겐 차갑게 식은 이 도시락이 얼마나 촌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겉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다시금 그녀를 덮친다.
"..뭐야?"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거 안 먹었어?"
자신이 잠깐 미적거리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기찬이 도시락통을 뺏어 든 것이었다.
"아..."
어젯밤 기찬이 손도 못대게 꽁꽁 싸맨 도시락인데, 아무도 먹지 않은 그 도시락이 유라는 그렇게나 부끄러웠다.
"다, 다른 맛있는거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배가 불러서 이건 그냥..."
초조함에 자꾸만 고개가 땅으로 처박힌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딸깍-
기찬은 그 자리에서 바로 도시락 통을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 동철은 도시락을 한번 열어보지도 않았는지, 도시락 안은 주먹밥과 유부초밥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났다.
기찬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가 주먹밥에서 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모텔 냉장고에 넣어두고 별짓을 다했다 한들, 이미 이틀이나 지나버린 도시락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 여름, 면회 가자마자 바로 먹었으면 또 모를까 지금이면 슬슬 맛이 가야하는게 당연했다.
"역시..."
울적한 목소리가 들린다. 유라였다. 아마도 냄새가 거기까지 퍼졌는지, 그녀도 도시락의 상태를 눈치챈 것 같았다.
"어휴,"
기찬은 한숨을 푹 내쉰다.
동철이 이제 상병이던가? 뻔했다, 십중팔구 피자나 치킨같은 사제음식이나 잔뜩 시켜서 배를 채웠겠지.
자신도 군생활을 했었고 그렇게 "사제음식"이라는 것에 환장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넘어가기엔...유라가 너무 불쌍했다.
그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덥썩-
그래서 기찬은 주먹밥 하나를 꺼내서 입으로 쑤셔 넣고는 마구 씹어댄 것이었다.
시큼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게다가, 멸치인건가? 젠장, 멸치 제일 싫어하는데...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유라가 깜짝 놀라든 말든, 기찬은 우걱대며 나머지들도 깨끗이 먹어치웠다.
"..."
벙찐 유라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기찬은 딱히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내가 먹게 놔두지.."
내가 왜 이걸 먹었는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툴툴대는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찬은 얼른 재촉해서 유라를 차에 태우곤 악셀을 거세게 밟았다. 영내 속도는 30Km/h라는 표지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는 재빨리 부대를 빠져나왔다.
슬픔은 쉽게 전염된다고 하던가,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꿔버리고 싶었다.
"우리 그래도 부산까지 왔는데, 맛있는거 먹고 가야지."
이게 아닌데,
말이 자꾸만 빙빙 돈다.
"그, 회 먹을 줄 알지?"
"네, 저 괜찮아요."
기찬은 대화가 툭툭 끊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답답할 때는 있었지만 적어도 그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상관 없었지만, 오늘처럼 "타인"에 의해 이루어진건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기찬은 갓길 아무데나에 대충 차를 멈췄다.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입 밖으로 꺼내놓을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도 말이다.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관계가, 아슬하게 맞춰둔 균형이 모조리 무너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고개나 끄덕이는 유라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지켜보는 이쪽의 속에서는 천불이 난 것 같았으니까.
그래, 아마 그래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겠지.
"이럴려고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미안하다."
결국 막아왔던 것이, 가슴 꽁꽁 싸매고 눌러둔 "무언가"가 입으로 삐져 나와버렸다.
"..."
예상하지 못한 기찬의 사과에 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로, 아마 절대로 들을 수 없을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언젠가 기찬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닿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을까하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그걸 연명줄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던 철 없는 자신은 진작에 없어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그럴거라도 생각했는데...
"그, 이럴땐...그냥 울어도 돼."
기찬의 쏘아올린 말 한마디는 쏜살같이 날아와 여린 자신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는다.
"..흑, 으흑..."
유라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슬픈 감정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눈물만큼이나 마구 솟아 올랐다.
미웠다. 기찬이 너무 너무 미웠다.
왜 나한테 그렇게 나쁜 짓을 한건지, 그 대상이 왜 하필 자신이었는지...
유라는 아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기찬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찬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는 다독였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것은 금새 사그라 들었고, 그의 품에는 약하고 힘겨운 작은 소녀만이 남았다.
"흑흑...으아앙!"
굵은 눈물이 방울되어 유라의 볼을 타고 내린다. 녹아버린 감정으로 가득찬 서글픔이 눈물을 빌어 쏟아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의 의미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고,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그 사실을 깨닿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랬어.. 왜, 왜..!"
동철의 서운했던 행동들이 마구 떠오른다. 자신의 도시락을 테이블 한켠으로 밀쳐두고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그의 무심한 모습이, 쉬어버린 자신의 도시락을 묵묵히 비워내던 기찬이 오버랩되며 자신의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믿을 수 없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찬보다도...그가 더욱 미웠다.
유라는 더욱 깊숙하게 기찬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매일 괴롭혀온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찬의 품이 자신에겐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찬은 아무말 없이 꼬옥 껴안아주었다.
그날 밤, 그 둘은 그 동안의 그 어떤 날보다도 가장 평범하고 조심스런 섹스를 나눴다.
13
<201X년 8월 24일 10:03 am>
"헉, 헉.."
기찬은 약속장소를 향해 헐레벌떡 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런게 만나기로 약속 한 시간은 9시 30분이었고, 반면 지금은 10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으니 ...벌써 30분도 넘게 늦어버린 것이었다.
"아오!"
이게 다 석철이 새끼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칭얼대는게 부쩍 늘긴 했지만, 이 개같은 놈이 오늘은 아침부터 전화질로 쪼아대는 탓에 이렇게 늦게 나오고 만 것이었다.
기찬은 다시금 그 신경질 나는 통화내용을 곱씹어 봤다.
「너 요새 왜 내 연락 씹냐? 나 피하냐?」
「아, 그런게 아니라 바빴다니까 또 그러네, 거 참..」
기찬은 슬슬 석철이 부담스럽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적당히 낄낄대며 어울릴 때야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딱히 녀석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를 넘는 요구를 해올 때가 많아져서, 솔직히 요즘 들어선 "슬슬 꺼져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시발, 그래. 내가 그 바빴다는 좆같은 변명은 들었다치고 넘길텐데, 너 왜 약속 안지키냐?」
「뭔, 약속?」
「발뺌하냐 개새야? 차 빌려주면 유라씨랑 떡 치는거 블랙박스에 찍어놓겠다더니...고작 키스? 키스으?」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적당히 끊고 나갈 준비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찬은 좀처럼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적당히 넘겨온 평소와는 다르게, 석철이 녀석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말 하긴 뭐하지만, 저 멧돼지같은 놈이 진짜 회까닥 돌아버리면 난감한게 한 둘이 아니었다. 잘못하다간 깽값을 받기 전에 반쯤 죽어나갈 걱정을 먼저 해야할 만큼 주먹을 거칠게 쓰는게 바로 석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녀석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느 미친 놈이 그딴걸 찍어서 공유하겠는가? 행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쪽 부류가 아니었다.
「내가 섹스하는거 찍어놓는다고 했냐? 그냥 찐한거 남겨둔다고 했지, 새캬! 내가 장난친건 미안한데, 솔직히 친구랑 친구 여친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여달라는게 정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기찬은 우선 말로써 석철을 달래며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이제와서 발뺌하냐? 아무튼 나는 이딴 쪽사리 가지고는 절대로 만족 못하니까, 빨리 네 놈 휴대폰 목록 안에 있는 것 중에 하나 골라서 빨리 보내라고!」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석철의 반응에 기찬은 일단 정말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착잡해진 마음으로 녀석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석철이 계속 물고 늘어지는 그 목록...그건 자신이 정리해둔 유라와의 동영상 리스트 제목이었다.
아마 두달 전 쯤이었나? 석철에게 한창 항문섹스에 대한 조언을 구하던 기찬은, 그저 가볍게 녀석을 골려줄 생각으로 자신의 휴대폰 안에 있는 유라의 폴더 리스트를 캡쳐해서 카톡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물론 역시 예상했던대로 석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우, 우와.. 너 이거 진짜냐? 여기 있는 리스트 정말 진짜냐고?"
하긴, 날짜와 체위가 상세하게 적힌 동영상이 리스트 안에 스무개도 넘게 있었으니 녀석으로선 눈이 돌아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새끼, 내가 그럼 이딴 걸로 뻥카를 치겠냐? 말했잖아. 걔는 내가 하자고 하면 다 해준다니까. 아무튼 알았으면 노하우나 좀 팍팍 알려줘봐. 그러면 혹시 아냐, 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기찬은 홧김에 저지른 자신의 바보같은 짓에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별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장난, 그냥 내가 이만큼 따먹어봤다는 아주 저급한 수컷의 자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 알았어. 맞겨만 달라고!"
게다가 굽실대던 석철의 태도는 쉽게 잊지 못할만큼 유쾌하고 짜릿한 거였는데...그게 이제 와서는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후우,"
기찬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차가운 손 덕분에 뜨거워진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빨리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직도 더럽게 울려대는 저 휴대폰을 조만간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계속>